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 불패의 신화를 만들어낸 이순신(1545~1598)은 단순히 전쟁 영웅을 넘어 해양강국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는 거북선이라는 혁신적 무기로 한산도대첩, 명랑대첩 등에서 승리를 거두며 조선을 구했으며, 『난중일기』를 통해 인간적 고뇌와 리더십을 후대에 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성웅 이순신'이 아닌, 원칙과 책임을 다한 '인간 이순신'의 진정한 가치를 재발견해야 할 때입니다.

거북선으로 세계 해전사에 이름을 남긴 전략가
이순신은 1591년(선조24) 2월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전라좌수영(현재 여수)에 부임한 직후, 왜구의 침략을 예견하고 즉시 군비 점검에 착수했습니다. 그가 가장 주력한 것은 바로 철갑선(鐵甲船)의 세계적 선구(先驅)로 평가받는 거북선의 건조였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부터 준비를 시작한 이 전략적 판단은 1592년 왜란이 터졌을 때 결정적 무기로 작용했습니다.
거북선은 단순한 전투선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돌격선이었습니다. 철갑으로 덮인 지붕 구조는 일본군의 화살과 조총 공격을 무력화시켰고, 선체에 장착된 포와 돌격 능력은 적선을 직접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이 거북선을 활용하여 옥포해전(1592.5.7), 사천포해전(1592.5.29), 한산도대첩(1592.7.8), 부산포해전(1592.9.1) 등에서 연속 승리를 거두며 일본군에게 공포를 심어주었습니다. 특히 한산도대첩에서는 학익진 전술과 거북선을 결합해 일본 수군을 완전히 격파하며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습니다.
이순신의 전략적 탁월함은 단순히 무기 개발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본의 수륙병진 전략, 즉 육지와 바다를 동시에 공격하는 계획을 정확히 간파하고 해상권 장악에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군은 보급로를 차단당하고 육지 진군에도 차질을 빚게 되었습니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한 이순신은 조선 수군 전체를 지휘하며 해양 방어의 핵심 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세계 4대 해전 영웅으로 꼽히는 그의 위상은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Salamis)해전의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제독, 1588년 칼레(Calais)해전의 하워드(Howard)제독, 1805년 트라팔가(Trapalgar)해전의 넬슨(Nelson)제독과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난중일기에 담긴 인간 이순신의 고뇌와 리더십
이순신은 무인으로서의 업적뿐 아니라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시문을 남긴 문무를 겸비한 인물입니다. 특히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7년간의 전쟁 기록이자, 그의 내면적 고뇌와 군사 전략이 생생히 담긴 역사적 문헌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일기를 통해 우리는 '성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의 생애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545년 3월 8일 한성부 건천동에서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초계변씨(草溪卞氏)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난 그는 본관이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입니다. 문반 가문 출신이었던 그는 1572년(선조5)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다리 부상으로 실격당하는 좌절을 겪었습니다. 32세가 되어서야 식년무과의 병과에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습니다.
이후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 1583년(선조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과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 1586년(선조19)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와 조선보만호(造山堡萬戶)를 거치며 경력을 쌓았습니다. 1589년(선조22)에는 선전관(宣傳官)과 정읍현감(井邑縣監)을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품인 원칙을 고수하는 정직함은 때로 상사의 미움을 사 백의종군이라는 치욕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난중일기에는 이러한 개인적 고통과 함께 전쟁터에서의 두려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부하들에 대한 애정이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명랑대첩(1597.9.16)은 그의 리더십이 극명하게 드러난 전투였습니다. 12척의 배만으로 수백 척의 왜군 함대를 맞서야 했던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라는 장계를 올리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용기가 아니라, 책임자로서 끝까지 국가와 백성을 지키겠다는 신념의 표현이었습니다. 그의 탁월한 군사 훈련과 인사 업무 능력, 그리고 부하들에 대한 신뢰는 불가능해 보였던 승리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유산과 21세기적 재해석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54세의 나이로 전사하며 "싸움이 급하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개인보다 전쟁의 승리를 우선시하는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조선 조정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1604년(선조37) 10월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하고 풍덕부원군(豊德府院君)에 추봉했으며 좌의정에 추증했습니다. 1643년(인조21)에는 충무(忠武)의 시호가 추증되었습니다.
1704년(숙종30) 유생들의 발의로 1706년 아산에 현충사(顯忠祠)가 세워지면서 이순신은 국가적 추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793년(정조17) 7월 1일에는 정조의 뜻으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고, 1795년에는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 문신 윤행임(尹行恁)이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간행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이순신의 업적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후대에 전승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국가적 차원에서 충(忠)과 호국(護國) 이데올로기의 상징으로 '성웅 이순신'이 급격히 부각된 측면이 있습니다. 이는 후대 '역사 만들기'의 산물이라는 비판도 받습니다. 정치적 목적으로 포장된 이순신상은 오히려 그의 진정한 가치를 왜곡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최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대중의 호응을 얻은 이유는 바로 정치색을 벗어나 '인간 이순신'의 모습을 부각시켰기 때문입니다.
21세기의 이순신을 키우기 위해서는 21세기에 맞는 이순신 상(象)이 수립되어야 합니다. 신라의 장보고와 더불어 해양수호인물로서 이순신은 명실공히 우리나라 해양인물상징입니다. 하지만 장보고가 다양한 문화사업을 통해 친근한 캐릭터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이순신은 아직 딱딱한 위인전기의 주요 출현인물이라는 인상이 짙습니다. 딱딱한 위인전기 이외의 다양한 텍스트개발과 CD·DVD 제작, 그리고 일선 교육계에서의 적극적 활용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세계 4대 해전의 영웅인 이순신을 국외로 알리는 일도 시급합니다. 중국 명대(明代) 남해원정의 총지휘관 정화(鄭和)처럼 각국이 자국의 해전영웅을 다양한 사업을 통해 추앙하듯, 우리도 이순신 캐릭터개발과 홍보에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세계 해전사에 남긴 이순신의 위상은 결코 축소되거나 부인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분명 '해양강국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해양인물입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가 해양부국임을 널리 알리고, 세계의 해양영웅 이순신을 낳은 해양강국 대한민국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야말로 충무공 이순신이 남긴 진정한 유산을 계승하는 길입니다.
이순신은 단순히 전쟁에서 이긴 장군이 아니라,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리더십과 끝까지 책임을 다한 헌신의 상징입니다. 거북선이라는 혁신, 난중일기에 담긴 인간적 고뇌, 그리고 충무공으로 추앙받는 역사적 의미를 종합할 때, 우리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진정한 가치로서 이순신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해양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이순신 정신의 현대적 계승입니다.